올림픽 재해의 악순환을 멈춰라 7. 빼앗긴 성취


인종주의와 경찰폭력에 맞서는 거대한 움직임이 일던 202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아시아 미술관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Avery Brundage)의 흉상 철거 계획을 발표했다. 인종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낡은 기념물들에 대한 격렬한 문제제기가 이어지던 때였다. 


나치 집권기에 열린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에서도 올림픽 보이콧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당시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브런디지는 실태 조사를 위해 독일을 방문했고, 모든 것이 훌륭하게 준비되고 있다며 “유대인 선수가 선출되지 않았다는 것이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일축했다. 심지어 “미국내 유대인들이 언론을 장악해 반독일 정서를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베를린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우리도 우리 체제를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근절하고, 애국심을 고양하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독일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한결같았던 브런디지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블랙파워살루트(Black Power Salute)를 행한 존 카를로스(John Carlos)와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에게 올림픽 참가 자격의 영구 박탈을 지시했다. IOC 위원장을 역임한 다른 파시스트들과 인종주의자들처럼, 그도 올림픽의 전통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프랑스 귀족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한 유럽 엘리트 남성들을 교육하는 도구”이자 "남성 운동경기에 대한 엄숙하고 주기적인 예찬"으로써 지금의 올림픽을 만들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에 적극 협력하고 히틀러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도 받은 쿠베르탱은 널리 알려진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였다. 그의 문제가 지난 시대의 한계였으며 지금의 올림픽은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013년은 쿠베르탱이 태어난지 150년이 되는 해였다. IOC는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했고, IOC 위원장인 토마스 바흐는 그의 무덤에 화환을 바쳤다. IOC는 그가 올림픽을 주창한 6월 23일을 기리며 올림픽의 날(Olympic Day)로 정해 매년 기념 행사를 연다. 


제1회 올림픽은 남성들만의 대회로 개최되었다. 2회에는 여성도 참가 가능한 종목이 생겼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여성 참가 가능 종목의 확대는 지지부진했다. 여성의 신체가 체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잘못된 관념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여러 종목에서 여성 선수의 참가는 제한되어 왔다. 여성 선수들은 끊임없이 부당함을 지적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왔다. 마라톤 경기에 여성이 처음 참가한 것은 1984년이었다. 동계 종목인 스키점프는 2014년 전까지 여성 선수의 참가를 금지했었다. 여성 선수들이 참가 제한을 없애기 위해 수년간 소송을 제기한 끝에 소치올림픽부터 노멀힐 경기 참가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라지힐 경기엔 여전히 나갈 수 없다. 2018년까지 IOC 위원이었고, 올해 6월까지 국제스키연맹 회장이었던 지안 프랑코 카스퍼(Gian Franco Kasper)는 스키점프가 “의학적으로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승자에게 화환을 씌워주는 것만이 유일하게 여성이 할 일이다. 일반경기의 여성 참가는 절대 금지되어야 한다. 관중이 요란하게 날뛰는 여성의 신체를 볼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저속한 일이다."라고 말한 쿠베르탱의 유산은 여전히 건재하다. 


1919년, 여성 조정 선수인 앨리스 밀리아(Alice Milliat)는 1924년 올림픽에 여성 참가 종목을 확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쿠베르탱을 비롯한 위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밀리아는 국제여성스포츠연맹(Fédération Sportive Fèminine Internationale)을 창설하여 1922년에 ‘여성올림픽대회(Women’s Olympic Games)’를 개최했다. 하지만 IOC가 올림픽 명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다음회부터 올림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1982년에 처음 개최된 ‘게이게임스(Gay Games)’도 처음에는 ‘게이올림픽(Gay Olympics)’으로 시작하였으나 IOC의 제재로 이름을 변경했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International Mathematical Olympiad)’도 오륜기를 연상시키는 로고와 ‘올림피아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여성과 게이는 올림픽 명칭을 쓰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IOC와 긴밀히 협력하는 국제체육연맹들은 성별검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직접 여성 선수의 성기를 확인하는 신체검사로 이루어지던 올림픽 성별검사는 1968년에 구강점막 도말검사를 통해 성염색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2011년부터 호르몬 수치 검사 결과를 기준으로 삼았다. 트렌스젠더로 처음 올림픽에 참가한 역도 선수 로렐 허바드(Laurel Hubbard)는 1년 이상 혈중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일정 수치 이하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IOC의 규정에 부합했기에 참가가 가능했다. 육상 선수 캐스터 세메냐(Caster Semenya)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여성 선수는 호르몬제를 복용해 일정 기간 수치를 낮추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자신의 주종목에 참가하지 못했다. 인터섹스 저스티스 프로젝트(Intersex Justice Project)의 피전 파고니스(Pidgeon Pagonis)는 “캐스터가 젠더순응적 이성애자 백인 여성이었다면 누구도 그의 몸을 침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와 체육적 성취 사이의 개연성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소위 ‘여성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에스트로겐과 체육적 성취 사이의 관계는 아예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소년기부터 체육 활동의 기회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지는 성취와 직접 관련이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가 당당하게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열리는 ‘퀴어여성게임즈(Queer Women Games)’는 2017년에 대회를 한 달 앞두고 동대문 체육관을 대관했다. 하지만 다음날 담당자는 “성소수자 행사라는 이유로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화로 이야기했고, 그 다음날 대관은 취소되었다. 소수자들은 여전히 공공시설 이용에 차별을 겪고 있다. 운동장은 아직도 모든 이에게 열려있지 않다. 


여성 선수들의 성취와 소수자 선수들의 성취는 올림픽의 성취와 동일하게 여겨지며, 올림픽을 ‘인류의 축제’이자 ‘이상 실현의 장’이라고 지칭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에 유독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감동적”인 사례로 여겨진다는 것은 현실에서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 삶과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수자 선수에 대한 특별한 찬사는 종종 제도적 차별과 배제를 그대로 유지해도 되는 알리바이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여성인권과 소수자 권리의 보장이나, 선수들의 성취는 오롯이 지금까지 노력해온 당사자들의 결실이며 올림픽의 성과가 아니다. 올림픽은 익숙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성취를 슬그머니 가져간다. 서울올림픽은 박정희 독재정권 말기에 유치 활동을 시작했고, 전두환 군부가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적극 추진하였다. 올림픽 개막을 1년여 앞두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유치 때부터 개최 때까지 10년 가까이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온 도시를 뒤덮었다. 하지만 오랜기간 폭압에 맞서 저항했던 이름없는 사람들의 헌신으로 이룬 민주화의 성취는 마치 올림픽이 가져다준 것 처럼 선전되어왔다. 우리 사회가 이루어 온 크고 작은 진전은 이를 위해 애써온 수많은 이들이 함께 만든 결실이지, 소수의 권력자나 IOC와 같은 이권세력의 성취가 아니며, 그들이 기여한 바도 없다. 올림픽 사업은 스스로의 본질인 차별과 배제, 억압과 착취를 가리고 앞으로도 지속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빼앗아간 성취를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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