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재해의 악순환을 멈추자 5. 치워지는 집, 지워지는 삶

2018년 겨울, 도쿄 시부야의 미타케 공원에서는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상영회가 열렸다. ‘상계동 올림픽’은 상계동 주민들이 집과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운 3년의 시간을 담고 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전역에서 ‘도시 미관 개선’ 사업과 ‘불량 주택 철거’ 사업이 진행되며 72만명의 올림픽 난민이 발생했다. 상계동에서 쫓겨난 이들은 명동성당 앞 천막에서 열 달 가까이 지내다가 부천시 고강동 경인고속도로 옆 부지에 가건물을 지어 정착하려 했다. 하지만 그 옆에서 올림픽 성화봉송이 지나간다는 이유로 집은 모두 부수어졌다. 


상영회가 진행된 미타케 공원 바로 옆에는 미야시타 공원이 있었고, 공원에는 100여채의 노숙인 주거지가 있었다. 2017년 3월에 아무런 사전공고도 없이 미야시타 공원은 폐쇄되었고 이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그 중 일부는 훨씬 작은 미타케 공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2019년에 미타케 공원도 폐쇄되었다. 도쿄올림픽은 환대를 의미하는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시부야구 전역에는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었다. 사업의 목적은 “다양성과 환대”가 있는 거리 만들기였다. 공원들이 있던 자리에는 일본 최대의 부동산 기업인 미츠이(三井) 부동산 주도로 호텔과 쇼핑몰 등이 있는 복합상업시설이 들어섰다. 시설의 이름은 “MIYASHITA PARK”다. 쇼핑몰 옥상의 정원은 야간이면 문을 닫았고, 주간에도 사설경비원이 출입을 통제하곤 했다. 개발회사는 모두의 공원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홍보했다.



도쿄올림픽 개막식이 진행된 신국립경기장 자리에는 메이지 공원이 있었다. 공원은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2013년에 갑자기 폐쇄되었고 여기 머물던 노숙인들은 모두 강제퇴거 되었다. 경기장 옆에는 1964년 올림픽 당시 강제이주된 사람들이 정착한 가스미가오카 공공주택단지 10개동이 있었다. 거주자의 상당수는 고령층으로 오랜 시간 가스미가오카에서 살아오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민들은 세 군데의 대체이주지로 뿔뿔히 흩어졌다. 이주 후 급격한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뜬 이도 여럿이었다. 



1935년에 개설되어 도쿄의 부엌이라 불렸던 츠키지 시장은 올림픽 관련 차량의 주차장이 되었다. 도쿄시가 일방적으로 츠키지 시장의 이전지로 결정한 도요쓰 시장 부지는 도쿄가스회사가 소유했던 땅으로 오염이 심각하여 활용처를 찾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철거를 반대했지만, 어떠한 협의도, 환경조사도, 정보 제공도 없이 철거는 강행되었다. 츠키지 시장은 값비싼 도심지인 긴자 옆에 위치해있다. 올림픽이 끝나면 시장 부지에 대형행사시설과 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상인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시장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는 1984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빈곤과 노숙을 범죄화하는 법률들을 만들었다. 거리나 차량에서 살아가는 것도, 벤치같은 공공장소에서 자는 것도 불법이 되었다. 경찰과 시 당국은 강도높은 ‘도시 미화 작업’을 시작했다. 올림픽 행사가 예정되어있거나 관광객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시내 지역에서 노숙인들은 체포되어 시설에 수용되거나, 그들이 가진 전부를 빼앗긴 채 먼 곳으로 쫓겨났다. 더불어 가속화된 개발사업으로 인해 1980년에서 1990년 사이 주택 임대료는 50% 이상 급등했다. 여전히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내에서 비주택 거주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며, 지금도 주택 임대료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2020년 기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는 약 6만 6천명의 노숙인이 살고 있다. 202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시는 노숙을 불법화하는 법률 적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시의회에서는 주택 임대료 인상 상한선 규제 완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상업용 부동산 개발 및 호텔 사업에 대한 세금 감면 혜택을 추진하고 있다. 노숙인 주거 철거 작업을 담당하는 경찰 부서의 이름은 ‘희망(HOPE)’이다. 


평창올림픽이 개최된 201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지 딱 30년이 되는 해였다. 각종 기념사업들은 올림픽의 성과를 자축하고, 당시를 즐겁게 회상했다. 같은 시간에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었다. 군사독재정권이 1975년부터 시작한 ‘사회 정화 활동’은 1980년대에 들어 “올림픽 등에 대비, 관광객들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국가기관 주도로 건전한 도시질서”를 확립하고자 더욱 확대되었고, 그 결과 약 1만 6천여명이 무작위로 잡혀가 전국 36개 시설에 구금되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시설이 형제복지원이었다. 1986년에 형제복지원의 실태가 알려지고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사회 정화 프로그램’은 중단되지 않았다. ‘생활 올림픽 추진단’이 단속을 이어갔고 ‘올림픽 특별 점검반’이 ‘부랑인 일제 단속’을 시행했다. 지금까지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롯한 ‘사회 정화 활동’으로 처벌받은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올림픽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개발사업은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민간 자본과 공권력이 결탁하여 땅과 집을 빼앗고, 용역깡패를 동원해 폭력적으로 주민들을 쫓아내는 재개발 방식은 이제 한국 도시 개발사업의 표준이 되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린 전시장 초입에는 서울시장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폐막식에서 올림픽 깃발을 전달받는 영상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불이 점화되는 영상이 반복 상영되고 있었다. 부적절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개발사업에 적합한 형태로 도시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강렬한 열망은 지금도 세계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달되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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